
왕눈이의 죽음이 시시때때로 나를 슬프게 한다. 아무런 복선도 없이 운전중에 한밤중에 어디서나 갑자기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진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나는 왕눈이가 살아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왕눈이가 꿈에 나오지 않는다

왕눈이의 죽음이 시시때때로 나를 슬프게 한다. 아무런 복선도 없이 운전중에 한밤중에 어디서나 갑자기 눈물이 왈칵왈칵 쏟아진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나는 왕눈이가 살아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왕눈이가 꿈에 나오지 않는다

왕눈이가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사랑은 영원할것이다
왕눈이를 사랑했던만큼 슬픔에도 책임을 질 것이다

얼마 전 살인범 장대호의 회고록을 다시 읽었다. 다시 보아도 묘한 글이었다.
살인 당시와 전후의 상황이 대화까지 생생하게 묘사된 점도 그렇지만, 미친놈이 쓴 글 치고 눈에 띄는 비문도 없이 차분하게 전개된다는 점도 특이하다.
누구나 한번쯤 속으로 ‘죽여버릴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겠으나 장대호의 글에서는 ‘죽여버릴까?’->실제로 죽임 사이에 너무 큰 비약이 있어서 이상하다.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하는 고민이랄게 없고 그 행위 자체와 그 행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안한듯 보인다
글 전체에서 상당히 이상한 도덕관념도 발견된다. 조선족 양아치 포주임을 강조하는 내용도 그렇지만, 신입에게 수금을 떠넘기고 가는것은 무책임해보여 그렇지 않았다는 내용이나….
암튼 그렇다

오늘 조성진과 안토니오 파파노의 베토벤 피협 3번을 듣다가 처음으로 지휘자가 되보고 싶었는데 왜인지 모르겠다. 더 흥미로운 베토벤 피협 3번 버전을 많이 알고있는데
여튼 피아니스트중에 성공적인 지휘자가 많다는 사실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봤는데
피아노를 치는 것에는 다른 악기들을 연주하는 것에 비해 polyphony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요구되는 것 같단 생각을 했다. 피아노를 위해 작곡되는 곡 자체가 현악기를 위한 곡들과는 많이 다르다. 제한된 현의 갯수와 제한된 운지를 고려하여 작곡된 현악을 위한 기악곡들보다 작곡가 입장에서 훨씬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다. 화음을 쌓는것, 성부를 나누는 것 등 피아노에서는 일상적인 곡 구성이 사실상 현악기에서는 거의 구현될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을 현악기로 구현하려면 많은 현악기가 필요한 것이고 그것이 심포니가 되는 거겠지
피아노 곡들의 구성이 다른 현악기들의 곡 구성보다 훨씬 심포니와 유사하여 피아니스트들에게 익숙할 것 같다. 어느 부분을 반주로 죽일지 어느 부분의 멜로디를 강조할지 복합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피아니스트의 일상이니

드뷔시의 피아노를 위하여 프렐류드와 슈만의 나비를 레슨곡으로 정하고 연습하고 있다. 둘 다 정말 좋아하는 곡인데, 치는 맛까지 있어서 연습이 고되지 않다.
이사 후 고양이들이 차례로 잔병치레를 하고 있다. 가벼운 감기인 듯 하여 다행이지만 그래도 걱정되는것이 솔찍헌 엄마의 맴,,,,
어제부터 다시 무언가가 되지 못했다는 느낌, 임시적인 상태라는 느낌, 도중에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그 느낌 때문에 때때로 괴롭다. 주위에 같은 상황인 사람이 없으니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지 않을까? 어쨌든 해소되지 않은 불만족이 있다. 그정도로 생각하려고 노력한다.